독서

지식인의 종말 문장 발췌(작성중)

studylida 2023. 1. 16. 21:00

오히려, 한 인물의 궁극적 입장과 초기 입장을 비교해보는 방법을 택해야 한다. 그래야 두 입장을 하나로 이어주는 끈을 밝혀낼 수 있지 않겠는가. 상승-변곡-추락을 한눈에 파악하고, 출발점이 비록 실망스럽더라도 감추지 말고 출발점부터 종착점까지의 과정을 빈틈없이 뜯어보아야 한다. - 11p
 
과거의 프랑스 지식인은 빛을 밝혀 주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엑소시스트가 되었다. 과거의 지식인은 시대를 명료하게 해석해 주었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시대의 어둠에 어둠을 더할 뿐이다. 과거의 지식인은 미래를 내다보는 견자見者였지만, 지금의 지식인은 거미처럼 사방에 발을 뻗치며 주목을 받지만 현실과는 동떨어진 사람이라 우리가 이 시대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이제 그런 지식인에게서 해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 11p
 
반면에 풍자적 소책자는 빛나지도 않으면서 반짝거리고, 파괴를 할 뿐 다시 일으켜 세우지 않는다. - 12p
 
반성을 위한 회고는 안경잡이, 염탐꾼, 노이로제 환자, 사교계 명사, 특권적 지식인, 변절자를 원망하지 않는다. 비난하거나 독설을 퍼붓기 위한 것이 아니다. 고유명사를 피해서 지위와 역할을 지칭할 뿐이다. 버터가 없는 과자이지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과자이다. 얼굴은 바뀔 수 있고 흥미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개개인 개념 정리를 위해서만 언급될 뿐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전체를 대신한 조각이라 생각하면 된다. 일탈적 현상이 아닌 꾸준한 흐름을 읽고, 배우가 아닌 줄거리를 보려는 시도이다. 개념은 사건, 사람, 행위, 반응 등의 감각적인 다원성에서 유일하게 명료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3p
 
절대적 신념으로 무장된 지식인들이 정치색을 띤 지식인으로 전락해 버린 현상은 물리학의 엔트로피 원리로도 충분히 설명된다. 그러나 병적인 현상은 양적인 변이성을 제외할 때 정상적인 현상과 다를 바가 없다는 클로드 베르나르의 원리에서, 우리는 '최초의 지식인과 최후의 지식인이 한 덩이리로 묶여질 때 그 둘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라는 의문에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다. - 20p
 
"엄격하게 말해서, 이런 증상들은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며 정상에서 어긋난 것도 아니다. 또한 자연의 충동적인 반응도 아니다. 다만 정상적인 상태와 병적인 상태에서 그 강도가 다르게 나타나는 것일 뿐, 그 모든 것이 예전부터 존재해 왔던 증상이다." - 21p
 
최초의 지식인은 억울한 죄인의 죄를 벗겨 주려 애썼지만(이것도 그들이 지닌 장점이다.), 최후의 지식인은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우려고 법석을 피운다. 어떤 성향을 지녔든 간에, 인과관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책임 있는 자리, 그것을 원할 뿐이다. 따라서 설명하려 하기보다는 언제나 고발을 일삼는다. 그들이 가장 즐겨하는 질문은 "그 사람, 좋은 사람이요, 나쁜 사람이요?" 이다. 이런 쓸데없는 질문으로 그들의 눈에도 더욱 중요한 질문, "그럼 나는 좋은 쪽에 있소, 나쁜 쪽에 있소?"라는 질문을 덮어 버린다. 최후의 지식인은 이런 교묘한 말솜씨에 어울리게 목소리마저 우렁차다. 자고로 인간은 건강해야 하는 법! 그들은 언제나 정의로운 사람을 자처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마음대로 재단해댄다. 고개를 앞으로 쑥 내밀고 감시의 눈을 번뜩이며,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지적한다. 과거까지 들먹이면서 말이다.(미테랑, 그 사람은 정말 의심스럽지. 사르트르도 독일군이 점령하던 시절에 분명한 색깔을 보여주지 않았어. 그냥 지나가자구. 오브라 부부, 그저 한숨만 나올 뿐이지. 빈틈이라곤 보이지 않았던 두 사람이지만 틀림없이 타협을 했을 거야. 게다가 공산주의에 동조했던 옛 친구들, 그들도 완전히 믿을 수가 없어!) 훌륭한 목동은 양떼의 도덕적 양심을 보증해 주거나, 보증의 부담을 덜어준다. 이처럼 도덕적 권위를 지닌 중재자와 신랄한 검찰관, 그 차이는 한 발짝일 뿐이다. - 22, 23p
 
최후의 지식인은 착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분노를 억제했고, 준엄함을 중도에서 잊어 버렸다. 그들은 인내하면 완성해 가는 과정보다는 선언적 평결을 선호한다. 말하자면, 노력보다는 화려함을 좇는다. 사물 자체보다는 사물의 가치를 따진다. 치유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렀다. 자승자박이다! '좋은 편'의 속성은 재론조차 되지 않는다. "그것이 어떻게 되었지?"라는 질문은 완전히 사라지고, 언제나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뭐지?"라는 질문 뿐이다. 물론 최후의 지식인도 선을 옹호하고 악을 배척한다. 휴머니즘을 찬양하고 범죄를 죄악시한다.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나? 그들이 정확히 어디쯤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에게 묻지 말자. 범죄에 대해서도, 범죄를 심판할 자격에 대해서도 묻지 말자. 그런 것은 그들에게 어울리는 질문이 아니다. - 24p
 
우리 행위와 이미지는 찰나에 평가받는 법이다. 따라서 첫걸음이 중요했다. 두 번째 걸음에는 누구도 관심을 가져 주지 않는다. - 26p
 
현자는 사상으로 자신의 정신을 제어하는 힘을 가지며, 시인은 단어로써 현실 세계를 제어하는 힘을 갖는다. 반면에 지식인은 단어와 사상으로 인간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현자는 글을 쓰지 않아도 깊은 생각을 해낼 수 있으며, 시인은 출판하지 않더라도 시를 쓸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인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신의 글을 출판하거나, 작금에 사태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을 널리 알려야 한다. - 27p
 
빅토르 위고의 말대로 "마르지 않는 진리의 샘으로 세상을 뒤흔들어 놓으려" 바로 이 자리에 세워진 빛의 도시,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파리에 진을 친 프랑스 지식인의 첫 소명으로, 찬란한 불씨를 뿌리고 확산시키는 것보다 더 자연스럽고 숭고한 역할이 무엇이었겠는가? 첫 의무가 그것이었던 만큼, 세상의 진실을 알리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첫 의무에서 필연적으로 예상되는 의무이기도 했다. 프랑스 지식인은 본질적으로 광고업자였다. 선전은 그의 숙명이었다. 따라서 최후의 지식인이 선전에 열을 올리는 것은 결코 비정상적인 현상이 아니다. 불확실한 독단적인 공급에서 고객의 수요 논리로 전환된 것은 지식인의 의지에 따른 변화가 아니라, 지식인이 그런 변화에 편승한 것이다. - 28p
 
두 주체 사이의 관계에는 언제나 객체가 있다는 사실, 사물을 개입시키지 않고는 존재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망각한 실정이다. 수많은 보통 사람들이 기술적인 장애를 제거해 주면서 프랑스 지식인들은 못된 습관을 갖게 되었다. 하부구조가 복수를 한 셈이었다. 하부구조가 장렬히 전사하면서 최후의 지식인들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도구화된 도구주의자, 자신이 설치한 덫에 걸린 사람들을 양산해낸 것이었다. 선의의 부메랑 효과라고 말할 수 있을까? 매스컴의 매체가 목적을 달성하는 데 알맞은 수단이라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수단을 수용하기 마련이다. 덤으로 매스컴이 요구하는 형식이나 스타일, 심지어 속도까지 맞추어 주면서, "단순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단순하지 않은 것은 쓸모 없는 것이다!"라며 야릇한 주장을 해댄다. 그래서 친구를 그대로 본떠서 상술을 발휘하며 효율성이란 건전한 상식에 맞춰 쓸모 없는 것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린다.(따라서 미묘한 것과 중간색을 선호하던 옛 장인들에게도 미세한 차이와 복잡한 것을 멀리 하는 것이 거의 직업적인 의무가 되었다.) 오케스트라 연주장의 입장료를 지불하는 사람이 음악을 선택한다. 인쇄물과 비디오의 인가권을 쥔 사람이 시합을 마음대로 주관하면서 승리자를 선택한다. 19세기 말경, 최초의 지식인들은 여론과 순수한 마음에서 손을 잡으려 했다. 물론 그때의 여론은 파스칼이 말했던 세상의 여왕'이었던 것이다. 그 여왕의 남편, 즉 최초의 지식인들은 여왕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는 동물처럼 늙어갔다. 이제 여왕의 남편은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주인이 더 이상 아니다. 어떤 점에서, 프랑스 지식인은 태어난 그 자리에서 소멸되었다. 이상과 민중을 하나로 연결시키려던 의지가 그렇게 소멸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것 하나, 즉 이상과 민중을 맺어 주려던 결혼상담소를 잊어 버렸다. - 29, 30p
 
프랑스 지식인은 1898년 집단으로 태어났다. 지식인에게 부여된 '서비스'라는 의무 중에서, 집중사격과도 같은 탄원은 각자의 개성을 그물처럼 멋지게 조율하고 결합해서 빚어내는 합창과도 같은 것이란 기억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외롭게 고독과 씨름하는 작가에게는 결코 같은 수준의 합창을 바랄 수가 없다. 어떤 운동이나 학파에 가담하더라도, 작가는 집단과 떨어져서 활동하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멀어진다. 결국 홀로 활동하는 작가는 꺽인 곷이기 때문에, 지식인은 힘을 결집할 때에만 활력을 되찾을 수 있다. 따라서 지식인에게 '내'가 끈끈한 '우리'를 가리킬 때에만 생명력을 갖는다. 이런 점에서 문학의 '나'와는 상당히 다른 편이다. 요컨대 지식인의 소명은 결집에 있다. 어떤 집단에 가담한다고 선언하는 순간, 그 집단이 갖는 지위를 휙득하기 때문에 인식론적인 관점에서도 이점이 있다고 할 수 있다. - 48p
 
(정상적인) 자율이 (비정상적인) 자립의 시대와 더불어 성립되었다. 여기에서 비롯된 시너지 효과는 기가 막힐 따름이다. 작가는 출판사의 고용인이 되었고, 시평란을 채워 주는 비평가도 그런 관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인기 있는 논설위원처럼, 매주 혹은 매달 현안 문제를 이리저리 짜깁기하는 글을 써내야한다. 그 결과로, 아웃사이더에게는 출입조차 허용하지 않는 게으름뱅이 클럽, 즉 다른 것에는 눈길조차 돌리지 않는 채 반 세기 동안 똑같은 역할을 지겹도록 해내면서 그들끼리만 쑥덕대는 비밀 조직이 탄생하게 되었다. 앞으로 최후의 지식인들은 그들의 위족 역할을 해주는 언론의 보조자로서, 그들 자신의 글만을 읽어대면 그만일 것이다. - 53p
 
어떤 상황에 대해서 누군가 발언을 할 때에는 인용 구문이 줄줄이 이어진다. 따라서 사건 자체가 무수히 쏟아지는 '의견의 표명'에 다소간 희석되기 마련이며, 더구나 왁자지껄하게 반복되는 공격과 반격으로 다른 사람들은 문제가 도대체 무엇인지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지경에 빠져든다. 이처럼 강제로 주어지는 평론에 의해서 사건은 삼켜지고 주물러져서 마침내는 가루가 되어버린다. - 53p
 
최후의 지식인들의 세계는 비밀스럽고 오리무중이어서 무척이나 객관화하기 힘든 세계이다. 반면에 서로에게 자극을 주는 우리 세계는 객관화할 수 있어, '기호라는 물리적 매체'를 통해서 분명해질 수 있는 이점을 갖는다. 따라서 최후의 지식인은 언론이란 그들의 매개체를 통해 짐작되는 그들의 세계를 바탕으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언론이란 매체가 그들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세계가 그들의 자아를 만들어내며, 다시 그 자아가 그들의 세계, 즉 그들의 매체를 변화시킨다. - 53, 54p
 
글쟁이는 돌연변이도 없는 아주 안정된 종족이다. 그들의 결점이라면 오만스런 언동과 에고이즘 이외에 우리를 호전적이면서도 과민하게 만드는 표피적 감수성이라 할 수 있다. 뱅자맹 페레는 앙드레 브르통이란 거물을 두고, "언론과 관계를 끊으려고 일 주일 동안 방에서 두문불출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동료가 우리를 한 단어 정도로 비방하면, 우리는 언론의 학살과 공모를 한 달 동안 줄기차게 규탄한다. 그런데도 다른 사람에게 인간적인 모욕을 가한 것은 그날 저녁으로 잊어버리고, 이튿날에는 환한 미소를 띠면서 그 친구를 찾아간다. 도무지 해결책이 없는 모순된 세계이다. - 59, 60p
 
요즘의 말싸움꾼, 즉 궤변론자들은 명랑한 사람들이고 도발적이고 활달한 사람들이다. 젊은 친구들에게 호감 가는 발언을 쏟아내고, 온갖 도시와 온갖 집회장을 휩쓸고 다니며, 만물박사처럼 모든 것에 떠벌리고, 논리라곤 없는 주장을 해대면서, 온갖 유형의 사람들과 교제를 한다. 요컨대 정치를 하지 않으면서 정치를 하는 셈이다. 그들은 즉각적인 결과를 목표로 한다. 그래서 커다란 꽹과리를 울려대면서, 졸고 있는 시민들을 잠에서 깨운다. 한 마디로, 아크로폴리스의 새 주인들이 신중하고 사려 깊은 사람들에게서 민주주의를 찬탈한 셈이다.(우직한 반동분자 아리스토파네스가 다시 살아난다면 지독히도 증오할 인간들이다.) - 61, 62p
 
선수들은 차례로 흑기와 백기를 들고 경기장에 오른다. 처음에는 개인전으로 시작하지만 곧바로 단체전으로 들어간다. 상황은 점점 결론을 내리기 불가능한 격론으로 치닫는다. 말싸움의 통로는 넘쳐흐를 지경이다. 윤리적 문제가 춤을 추고(철학자들이 윤리가 뭐냐고 묻고, 궤변론자들은 윤리가 무엇에 필요한 것이냐고 묻는다.) 사회적 삶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고(피고의 입장이든 원고의 입장이든 간에 소송은 궤변론자들의 특기였다.) 거듭된 토론으로도 평행선을 긋는 주장들에 민주적 행태라는 핑계가 주어진다. 게다가 진실에 도달할 수 있을까 의심스러운 사회, 쉽게 말해서 비슷한 것에 만족해 버리는사회에서 개진되는 주장들이다. (하기야 어떤 것이나 나름대로의 광채는 있는 법이다.) 또한 서민들의 운동시합을 엘리트식으로 해석한 것이라 할 수 있는 흥분된 말싸움과 헤겔의 변증법(이제 정 · 반 · 합은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언론의 개념이다.)이 타협하는 것을 목격하는 즐거움까지도 있다. 경기장과 경기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호각이 프랑스 언론인의 손아귀에 있기 때문에, 프랑스 언론인(투표권이 없기 때문에 양 진영을 오가며 조정자 역할을 맡았던 아테네의 행정관처럼)은 가능한 타협책이 없는 논쟁을 제멋대로 조절할 수 있다. 찬성과 반대는 일종의 훈련이지만, 너무나 자주 반복되어 참가자들에게 약간은 수치스런 구역질을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결론을 끌어내지 못했다는 무력감에 진절머리를 내게 만든다. (결국 칠흑같이 어두운 터널 속에서 검둥이들이 싸우는 꼴이다.) 그러나 코치만은 문제가 악화되기 전에 교모히 빠져나온다. 코치는 자신이 싸움판에 끌어들인 두 사람을 싸잡아 비판하는 동시에, 허무주의적 입장(모든 입장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지만, 결국에는 어떤 주장도 쓸 만하지 못하다.)에서 양극단을 포용하는 중도주의자로서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 62, 63, 64p
 
요즘의 문인들에 비해서, 1700년대의 문인들이 훨씬 개방적이었다. 요즘의 문인들은 사실이나 근본에 근거하기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규정해야 한다는 명분 때문에 나름대로의 원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런 구심적 굴레는 점점 유독한 독성을 유포시키면서 생산성을 잃어간다. 집단 에너지의 70~80퍼센트가 파벌 다툼과 금전 문제의 해결에 소모되기 때문에, 이탈리아 마피아의 세계와 그다지 다르지 않다. 한편으로, 소우주인 인간에게는 언제나 열려 있는 마이크가 있기 때문에 전국에서 총알이 빗발치는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게다가 아주 사소한 분쟁거리가 미디어의 힘을 빌어 확대되면서 전국적 사건으로 둔갑한다. 신문과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서 전방향으로 반향을 일으키고, 머리가 핑핑 돌고 헛구역질이 날 정도로 과열되며, 그것에 온실 효과까지 덧붙여져서 귀가 아릴 정도로 헛소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런데 그 헛소동이 전세계에 널리 퍼지면서, 처음에는 하찮았던 사건이 아주 대단한 사건처럼 비춰진다. 또한 우스꽝스런 집안이 정부 부처와 생방송으로 연결되면서, 섬망증 환자들과 정부 지도자들이 커뮤니케이션 통로를 공유함으로써 온갖 잡스런 관계가 빚어진다. '미디어 당'에 가입함으로써, 정치평론계의 인텔리겐치아는 전 국민을 그들의 당, 즉 그들의 싸움판에 가입시키고, 명령권자들을 그들의 철학적 토론장에 끼워 넣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물론 그들의 재능만으로 이룩해낸 업적은 아니다. 테크놀로지를 열렬히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테크놀로지가 안겨준 선물이라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 68p
 
시대의 희극에 동참해서 어떤 것이나 해석해낼 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순간적인 감정에 들떠있는 사람들이 일간지, 즉 버릴 수도 없는 허망한 양식이 되어 버린 일간지의 현실감 상실에 대해서 보증해줄 수 있는 것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 71p
 
로베르디는 "인간은 현실을 분명히 전해 주기에 불완전한 안내자"라고 말했다. 그러나 인간은 다른 영장류들이 갖지 못한 완충 장치, 즉 언어를 지닌 동물이다. 이런 완충 장치 덕분에, 우리를 에워싼 충격적인 혼돈 세계에서 취할 것과 버릴 것을 선별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기대한 것만큼이나 강력한 방어막은 아니지만, 제대로만 사용한다면 유효기간을 늘려가면서 불쾌한 것들과의 접촉, 심지어 현실 세계와의 접촉도 미뤄줄 수 있는 장벽 역할을 해낸다. 상징적으로 표현해서 날개 없는 두 발 짐승인 인간은 뒤늦게 얻지만 별로 구속을 받지 않는 능력을 '공격적으로' 사용해서 현실에 파고들어 현실의 껍질을 벗겨내고 그것에서 그럴 듯한 관절을 찾아내려 한다.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반드시 필요한 출구처럼, 궁극적으로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또한 인간은 그 능력을 '모방적으로' 사용해서, 삼투와 융합이란 과정을 통해 현실세계를 자기만의 세계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말하자면 로베르디와 같은 시인들에게서 주로 발견되는 현상으로, 여기에는 집중력과 겸허한 자세가 전제되어야 한다. 끝으로 인간은 이 능력을 '제한적으로' 사용해서 먹물 속의 갑오징어처럼 자기만의 공간에 머물며 잘못된 만남을 피하려 한다. 인간이 가장 손쉽게 택할 수 있는 방법이면서도 사회에는 가장 필요한 방법이다. 다소 안정감을 주는 이런 은둔의 기술적 장비는 오늘날 '커뮤니케이션'이라 불리고 있다. - 71, 72p
 
가장 확실하게 감추는 방법은 '복제하는 것'이다. 클레망 로세가 분명히 증명해 주었듯이, 현실 세계는 복제를 인정하지 않는 특별한 바보이기 때문에 이중으로 보는 방법과 올바르고 정확하게 보는 방법 중에서 선택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최후의 지식인들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시각, 즉 '실제로 존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으려는 독특한 시각'은 새롭게 드러나서 잘 모르는 것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잘 아는 것에 비교함으로써 "우리가 달갑지 않은 경쟁자를 다른 사람과 경쟁하도록 만들 듯이 현실 세계를 복제하는 수법"(클레망 로세)이다. 이런 확대경으로 보면, 도무지 근거를 찾을 수 없는 황당한 것이나 하찮은 것이 이미 잘 정비된 대단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는 거울 그림처럼 보인다. 말하자면, 바다에 가보지도 않고 발에 물을 적시는 셈이다. - 73p
 
최후의 지식인들은 역사적 사실들과 관련해 인과관계를 추론하고 새로운 생각들을 만들어내서 지엽적 성격을 띤 상황들을 연결시키는 데 천재적인 재주를 보여 준다. 그 결과로, 역사만의 특이성에서 악의적인 요소가 부풀려지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가령 당신이 사회주의적 사상을 개진하면 그들은 스탈린식의 공포정치를 들먹이고, 민족적 사상을 개진하면 1차대전으로 연결시킨다. 동물을 박제로 만들고 식물을 그늘에 말려서 보존하듯이, 사건을 박제화시키는 이런 재주는 다양한 이점을 갖는다. 새롭게 태어난 표본 제작자로써 온갖 것을 수집해서 현미경 같은 눈으로 들여다본다. 또한 현대판 공포물 박물관장으로서, 어떤 식으로 움직여도 선이 틀어지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다는 생각에 젖어 이곳 저곳을 바쁘게 돌아다녀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는다. 인륜에 대한 범죄, 전쟁 범죄,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하지 않는 범죄 등을 기준으로 삼아 역사의 심판을 재해석하려는 시도는 효율성을 앞세움으로써 적법하고 정당한 절차를 무시한다. - 74, 75p
 
'스탈린!', '히틀러!' 등과 같은 독극물에 면역되어 버린 여론에 충격을 주어 철옹성과도 같은 무관심을 허물기 위해서라도 과장이 필요하고 기준점을 높여야 한다. 누구나 공포심을 느낄 만한 시체더미 위에 올라서서, 최후의 지식인들은 '아우슈비츠와 콜리마Kolyma의 세기'를 떠벌리면서 예측한 대로 과장된 글을 써댄다. 세상에 종말이 닥친 듯이 겁을 주면서 몰아붙이는 야만적 목소리는 반수면 상태에서 빈둥대는 대중의 숨통을 졸라매서 분발을 촉구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대중에게 무능함을 절감하게 만든다. 우리처럼 대수롭지 않은 인간은 감당할 능력이 없다는 무력감을 안겨 준다. 결국 무력감을 떨치고 다시 일어서려면 우리 모두에게 그런 도깨비라도 필요한 것일까? 그러나 이런 협박에는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 공산주의 선전 선동에 미친 사람처럼, 그들도 건달로 전락할 위험이 다분히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처럼 열광적으로 떠들어대던 꼭두각시들이 겉으로나마 힘겹게 얻었던 것도 결국에는 설득력을 상실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 77, 78p
 
보편화된 무력감 속에서, 어떠어떠한 학살극이나 비극으로 죽어간 희생자들의 수-공산주의에서 수억, 르완다에서 1백만, 코소보에서 10만-에 대한 언급은 단순한 셈이 아니라 하나의 공리가 되었다. 결국 수치는 과장을 계량적으로 해석한 것으로, 여전히 계속되는 종족 말살의 실체를 확인해 주고 그 성격을 실증해 주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수치는 진실을 알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대중을 환상에서 깨어나게 하려는 목적이 숨겨져 있다. 전체주의자, 파시스트,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 등의 낱말이 어떤 집단에 붙여지는 명칭에 불과한 시대가 되었듯이, 과장된 표현으로 부풀려진 글은 과거의 목석 같은 언어(즉, 영원불멸하고 한결같은 냉정함을 간직했던 언어)에 새로운 생명을 주는 수식어 역할을 해낸다. 하지만 지나친 도덕주의는 지나친 공산주의만큼이나 동어반복일 뿐이다. 자기 혐오증에 빠진 커다란 꼭두각시들에게 공통적으로 찾아지는 현상이다. - 78, 79p
 
이처럼 사팔뜨기 눈으로 계량화된 수치가 저주스런 모호함을 그런 대로 메꿔 준다. 그러나 도살자들을 향한 의심스런 찬사의 징조로 여겨지는 자료나 분야에 대한 정밀한 연구는 부족할 뿐이다. 어쨌거나, 도덕적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려는 언론의 뒤편에는 과장과 부풀리기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야 경고의 목소리를 높이면서 다른 모든 것을 압도할 수 있지 않겠는가! 미묘한 차이, 복잡함, 정확성을 지키려면 비용이 점점 많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여행비와 체류비, 현장 요원, 조사 기간 등에서 만만찮은 비용이 소요된다. 열정은 값싸게 얻을 수 있지만, 냉정하고 차분한 글은 비용이 들어 부담스럽다. 주먹질, 삿대질, 격분······ 이런 것들이 무일푼의 정보기관, 혹은 목적을 위한 수단을 갖추지 못한 사람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이처럼 절약을 우선시하는 언론은 자연스레 과장을 부추기면서, 정확한 사실의 기술보다는 두루뭉실한 글을 선호한다. 사실적인 것은 턱없이 비싸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자본이 급속히 축적되면서 이 세상은 절제와 힘을 혼돈하고 있는 셈이다. - 79p
 
간혹, 현실을 파악하는 현대적 방식이 우리에게 좀더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안목을 안겨줄 것이라 믿었다. 예를 들어, 암실은 장르의 법칙을 파기해 버렸다. 그래서 흑백사진은 군더더기 없이 사물과 사람을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해 준다. 말하자면, 보는 사람의 상상력이나 거짓이 개입될 틈이 없이 대상과 영상을 곧바로 연결시킨다. 정말이다! 하지만 그 사진을 보는 사람, 즉 우리는 사진 아래에 설명문을 덧붙임으로써 결여된 상상력을 메우려 한다. 일종의 환상을 만들려는 안간힘이다. 옛날에, 과학자로 자임했던 뛰어난 사람들은 증명사진으로 범죄자를 가려내려 했다.(좁고 움푹 들어간 이마, 돌출된 턱, 돌출된 미궁). 악마의 종족, 유태인과 타락한 인간을 추적하는 신화학도 있었고, 가장 신뢰할 만하고 가장 정확한 번식방법이 발전함과 동시에 '생물학적 유형'과 '신체적 유형'도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사진은 존재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재현하는 반면에, 텔레비전은 상상력을 불사르려는 우리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는다. 또한 컴퓨터, 정확히 말해서 컴퓨터 사진은 현장의 속도감을 기존의 환경효과에 덧붙여주는 역할까지 해낸다. 따라서 NTIC가 과장된 것이 우리에 미치는 영향을 감소시켜 주리라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NTIC는 우리 상상력을 더욱 키워줄 따름이다. - 82p
 
사람들은 과학과 예지력, 그리고 학식과 임기응변은 반비례한다는 공식을 세우고 싶어한다. 따라서 "정오부터 오후 4시까지 땡볕이 내리쬘 때 여행 가방을 끌고 다니는 사람이 가장 많다"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결국 머리에 든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속이기 쉬운 것일까? 그렇다면, 이런 것이 우민정치가 아니겠는가! 이렇게 된다면, 문맹이 대학 합격자보다 인격자가 될 가능성이 훨씬 크다고 주장할 수도 있게 된다. 통찰력이 암산력과 무관하듯이, 기개 있는 인격자도 교육의 정도와는 무관하다. - 87p 
 
만일 통계학자가 그 시대에 발표된 성명서들을 모두 확보할 수 있다면, 시대를 인식하는 각성력과 교육 수준에는 어떤 상관 관계도 없다는 결론을 내릴 것이 뻔하다. 간단히 말해서,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전혀 별개의 것이다. 지식은 분별력이 아니다. 뛰어난 학문적 지성이 곧바로 시대 상황을 인식하는 지성으로 연결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 88p
 
불운한 탓에 잘못된 글이나 허튼 소리를 제외하더라도 지난 30년 동안 발간된 베스트셀러와 잡지에 저명한 지식인들이 시평이란 이름으로 발표한 글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과연 최후의 지식인들이 무엇을 하는 사람들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다. 성벽을 순찰 돌고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 준다고 하지만, 결코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알려주는' 괴상한 예측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전쟁을 앞두고는 평화를 예언하고, 평화를 앞두고는 전쟁을 경고한다. 언제나 뒷북을 치면서 후회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마다, 과거의 승전을 교훈삼아 장래의 패배를 준비했던 옛날의 프랑스 고급 장교들이 떠오른다. 이처럼 평균 이하의 직관력을 지닌 사람들이 목소리는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떠들썩하다. - 89p
 
최면상태에서 갑자기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꼭두각시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다다이즘에 빠져든다. 따라서 말하려는 주제의 성격에는 관심조차 두지 않는다. 무엇인가를 줄기차게 말하자면 건질 것이 거의 없다. 결국 무엇에 대해 말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에 대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다는 자체가 중요할 따름이다." - 91p
 
이처럼 매일 밤 재앙을 경고하는 예언들에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종말이 임박했다고 외쳐대는 그들의 주장을 알기 쉽게 풀이하면 이런 정도가 될 것이다. "이제 한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 그래도 여러분에게 경고하려 내가 이 자리에 왔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자, 내 손을 잡아라.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 93p
 
"단순한 정치학 서적을 뛰어넘어 인류의 운명에 대한 사색"으로 평가되는 책이 있다. "장-프랑수아 르벨은 우리 시대의 핵심적인 문제에 곧바로 접근하고 있다. 즉 우리에게 소비에트 제국주의를 인정하게끔 만들어주는 완만한 변화에 대한 문제이다. 르벨의 주장에 따르면, 민주주의는 현재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다. 예를 들어 30년대에 그랬던 것처럼 내부의 부패에 의해서 위협받고 있는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힘 앞에서 지레 굴복하고 말 것이다. 정신 세계가 미리 그렇게 준비해온 것처럼 예속화를 받아들일 것이다. 투쟁하려는 의욕조차 보이지 않고 필연적인 운명이라면서 체념하고 말 것이다." "저자는 명철한 추론, 날카로운 어법, 격양된 어조, 그리고 뛰어난 종합력"으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점들을 설명해 준다. 1) "활활 타오르는 불길의 이미지를 훼손시킬 생각으로 매순간 헤아릴 수 없이 조장되었던 자발적 무지에 의한 맞불" (p.34)에도 불구하고 민주주의는 공산주의라는 거대한 롤러 앞에서 실질적인 패배를 당했다. 2) "목록화한다면 산더미 같은 백과사전으로도 부족할 재앙들"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왜곡함으로써 서유럽의 패주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다. (p.171) 3) 술책과 기만 선전을 제외하고는 크렘린의 수뇌부에서 "권력 계승이란 코미디" 이외에 기대할 것이 없다. 이처럼 완벽하게 자료화되고, 현실을 올바로 깨닫게 해주는 각성제라고 언론들이 극찬한 이런 주장들에 "무지한" 정치가들과 "순진한" 소련 연구자들만이 반론을 제기할 뿐이었다. - 94, 95p
 
놀랍게도 프랑스에서도 국민전선이 노도와 같은 물결로 밀어 닥쳤고, 이때 모든 프랑스 지식인들이 동원되어 야비한 야수에 맞서 10년 동안이나 제방 쌓기에 나섰다. 물론 여기에서 가장 큰 혜택을 본 사람들은 문제의 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다. 하여간 제방 쌓기는 극우가 순전히 내부적 이유로 분열을 일으켜 위축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가 그 당시에 소수의 행복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또한 유고슬라비아가 비극에 떨어지면서도 우리를 그 소동에서 비켜나게 해주었던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이에 고무된 한 논설위원은 곧바로 "사라예보를 강타한 암흑의 기운이 걷잡을 수 없이 전 유렵을 어둠에 빠뜨리고 있다"고 쓰면서, "히틀러가 독일의 정권을 잡았던 1933년의 상황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듯하다"고 덧붙였다. 일단 이런 전제를 제기한 까닭에, 그는 우리의 무책임한 지도자들, 특히 비열하고 근시안적인 대통령(최후의 지식인들의 눈에는 정치인들이 본질적으로 이런 존재들이라 비치는 모양이다.)의 환상을 널리 유포하는 책임을 떠맡게 된다. 실제로 엘리제 궁의 주인은 "역사적으로 한 번도 주권을 누려보지 못했던 민족까지 독립국이란 주권을 쟁취하려는 것이므로 발칸 반도를 민족정신이 전반적으로 각성된 무대"라고 확인해 주었기 때문에, 이처럼 상식적인 지적은 "우리가 당연히 사랑해야 할 유럽의 몰락을 진정으로 분노하면서 지켜보지 않았던 너그러운 사람들까지 분노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깜짝 놀랄 새로운 발견까지 덧붙여진다. "20세기가 시작되기 전까지, 정확히는 유고슬라비아가 탄생된 1918년까지, 그 민족들은 결코 서로 다툰 적이 없었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중세 이후로, 그들은 언제나 거대한 집합체의 일원이었다. 말하자면 제국이란 형태를 띤 나라의 일부였다. 그 제국 내에서 그들의 주된 관심사는 민족적 고유함을 지켜내는 것이었다." 따라서 "두 번에 걸친 동방의 위기"(1857년과 1878년), 1912년과 1913년의 발칸 전쟁, 1898년부터 1909년까지 피를 뿌리면서 지루하게 계속된 코소보인의 숙청, 그리고 불가리아인, 마케도니아인, 알바니아인, 그리스인, 세르비아인 사이의 살인극, 그것도 의용 민병대와 비정규군끼리의 살인극은 도덕적 오류 때문이란 설명이다. 또한 "역사의 완전한 왜곡"이라 비난하는 역사의 기억상실증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똑같이 야만적인 '부족들' 사이의 해묵은 증오심이 그런 분쟁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라는 왜곡된 역사 인식을 보여준다. - 97, 98p
 
시대의 징후를 수집해서 미래를 연구할 자료로 사용할 여론조사에 국가기관이 수백만 프랑을 낭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다. 국가기관은 그렇게 많은 돈을 써대며 입장을 정리하지만, 최후의 지식인들은 한 달에 한 번씩 50통의 전화로 아주 값싸게 여론을 수렴한다. 의식세계를 아주 정밀하게(르노 카뮈를 읽어야만 합니까? 오스트리아를 여행해야만 합니까? 이란산 철갑상어 알젓을 사야만 합니까?) 인식해 보려는 친화력 이외에도, 우리의 통계 조사원들은 안개를 헤치고 나아가고 싶은 사람들에게 확실한 안내인 역할을 해준다. 그들이 오른쪽 길을 택하면, 왼쪽으로 돌아가라! 그럼 결코 후회하지 않을 테니까! 그렇다고 최후의 지식인들이 당신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이 예전에 몸소 그렇게 행동해 보였기 때문이다. 1968년경, 그들은 우파에 합류하려 좌파를 지독히도 신랄하게 공격하지 않았던가? - 99p
 
기분이 불쾌해질 정도로 철저한 분석이 있게 된다면, 어떤 지식인이라도 자신은 물론이고 사회적 유명인사들과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다. 이런 것은 메시아 신앙도 아니고 도덕주의도 아니다. 시대착오적 발상은 더더욱 아니다. 입으로 떠벌리는 세계에서 현실에 충실한 원칙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아리송할 따름이다. - 100, 101p
 
기가 막힌 것은, 과거를 회고할 때를 제외하고는 세상을 올바로 직시하는 사람들 중에 고매한 사색가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다! 기가 막힌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분명히 부정적인 자질로 질책을 받아야 마땅한 통찰력의 부족이 미덕처럼 여겨지는 세상이다. 안에서는 성공의 강력한 수단이 되고 밖에서는 명성을 얻기 위한 담보물이 된다. 그 현대판 협객을 곰곰이 뜯어보자. 커다란 심장, 가벼운 머리, 그럴듯한 몸가짐. 이런 모습에서 어떤 대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최후의 지식인들은 집단 의식이란 흐름에 동참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똑같은 눈가리개를 하고 있어 첫 눈에 알아볼 수 있으며, 난해한 말을 쏟아내고 심심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어 우리에게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준다. 모두가 의견의 일치라도 본 듯이 똑같은 말을 뱉어내지만 우리보다 한 옥타브쯤 목소리가 클 뿐이다. 이처럼 무례한 언동이 지루하게 계속되면서 세상은 점점 나락으로 떨어지며, 현실 세계는 도덕과 문학에서 불행한 시대라 해석한다. - 101p
 
이렇게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온갖 혜택을 누린다. 또한 과거의 오욕을 씻어낸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의 존경심까지도 은근히 기대해볼 수 있다. 실제로 우리는 도덕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이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게 더 큰 찬사를 보내오지 않았던가! - 107p
 
슈나이더의 말을 계속 인용해 보자. "그런 것을 연대의식이라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산 제물을 바쳤던 옛 성직자들을 흉내낸 연극증일 뿐이다. 타인을 위한 전투적 태도일까? 아니면 타인을 자아에 끌어들이는 자체를 즐기는 나르시시즘일까? 최악의 상황에 빠져 고통받고 배척받으며 좌절하는 타인들! 오늘날 선은 그런 타인을 위해서 아파하는 척하는 것이 선이기 때문이다." - 108, 109p
 
바르트가 인도 차이나 전쟁동안 지적했듯이, 도덕적 문체의 변함 없는 특징은 "동사를 파괴하고 명사를 부풀리는 데 있다." 신화는 실천이 아니라 이름 붙이기에서 탄생하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적을 온갖 뜻이 함축된 비천한 단어에 집약시켜 그 핵심적 속성(비에트, 루즈, 펠라가, 세르브)으로 무시하듯 불러댐으로써, 그들이 저항하는 이유를 외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서, 그런 분쟁이 일어난 이유와 분쟁 과정에 대해서 면밀한 검토를 불필요하게 만든다. 이런 어가를 띤 언어가 재등장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징조가 아니다. 그런데 다시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세상이 되면서 이런 언어가 꽃피우고 있다. - 112p
 
도덕! 도덕은 스스로에게 적용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을 앞세운 세대는 지독한 불량배들, 즉 도덕적으로 공격받을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주제에 대해서나 어떤 주장이라도 해댈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행세하는 사람들을 무수히 양산해냈을 뿐이다. 시대의 본분보다는 주장의 강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깡패들, 전에는 프롤레타리아, 요즘에는 인권을 주장하는 전도사들의 강력한 의지에 감동해서 희생자들을 전면에 내세우고 결국에는 그 희생자들을 지원하는 데 마땅한 위치에 있지도 않은 정부의 무능력을 드러내주는 불량배들이다. - 114, 115p
 
도덕주의는 도덕이란 이름으로 이 땅에서 사라지게 하려던 것을 배가시켰을 뿐이다. 도스토예프스키도 그 시대의 인텔리겐치아 시각에서, "무제한의 자유에서 출발할 때에는 결국 무제한의 독재를 낳게 될 것이다!"고 경고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무소불위의 도덕주의를 앞세울 때, 우리는 선의에서 비롯되는 폭력과 거짓의 세계로 치닫게 마련이다. - 116p
 
최초의 지식인들이 의식세계와 양심을 되돌아보면서 거듭해서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과는 정반대로, 최후의 지식인들은 경솔하게 보일 정도로 거침없이 행동하고 말한다. 미디어와 주변 세상을 그대로 본떠서, 반성의 시간을 조금도 허락치 않으면서 앞만 보고 내달린다. 뻔뻔스럽자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잘못된 실수를 자꾸 기억한다면 신중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래서는 시대에 뒤떨어진 존재가 되어버린다. - 117p
 
반성은 필요한 것이다. "하나의 사상, 하나의 상황, 하나의 문제를 더 철저하게 분석하려면 거듭해서 생각하는 자세, 그 생각 자체의 타당성을 살펴보는 자세가 필요하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반성하는 사람은 하나의 길을 두 번 걷는 셈이다. 처음에는 더듬대면서, 다음에는 세밀한 지도를 그려가며 걷게 된다. 최초의 지식인들[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최후의 지식인들은 알레그로 비바체를 좋아한다. 하루가 24시간인 것도 부족할 지경이다. 문자시대에서 영상시대로 바뀌면서 박자도 빨라졌다. 길게 호흡할 틈이 없다. 되도록 짧게 호흡해야 했다. 저장문화에서 배출문화로 전환되면서 일어난 전형적인 현상이다. 금세 배출해야 하는데 생각하고 반성할 틈이 어디에 있겠는가! 오늘 말한 것이나 기록한 것은 내일이면 지워버린다. 영상시대는 세심한 사람들에게 순간의 즐거움을 찾도록 만들었다. "지금이 모든 것이다"는 구호는 내가 말하거나 내가 행하는 것에서 어떤 결과도 끌어내려 기대하지 말라는 뜻이다. 곰팡내를 풍기는 것을 신바람나게 빈정대는 아첨꾼들에게 어찌 만능열쇠와도 같은 '기억의 의무'를 요구할 수 있겠는가! 회한이나 후회는 성직이나 국가적 차원일 뿐 개인적 차원의 것은 아니다. 모택동주의자들도 그 시대에는 중국을 여행한 후일담으로 수많은 평론과 책을 발표했지만 그 시대가 끝난 후에는 모택동을 잊어버렸다. 또한 수많은 지식인들이 바웬사를 발가벗겼지만, 바웬사는 정상에서 물러나면서 잊혀진 인물이 되어야 했다. 솔제니친이 변화시켰던 사람들은 어떤가? 20년 정도가 지나가자 솔제니친이란 이름마저 잊으면서, 그가 시대를 되돌아보며 우리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던가를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나는 속았다"는 한 마디로 모든 것을 대신하려 할 뿐이다. 몸에도 맞지 않은 이데올로기에 싸여 살다보면 기억상실증에 걸리기 십상이기 때문에 엉겁결에 속은 것이었을까? - 118, 119p
 
인도주의 전쟁이 벌어지고 1년이 지난 후 프랑스의 인도주의자들이나 미국의 언론들이 보여 주었던 자기비판적 행위는 전혀 비판적 사고를 지닌 사람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과거에 썼던 글들을 다시 읽고 실제의 결과와 대조하면서 비판하는 것보다 더 '지적인 행위'가 있을 수 있을까? 간섭하고 참견할 의무에는 언제나 충실하지만, 면밀히 검토하는 의무에는 가끔씩 관심을 갖는다. - 123p
 
다른 하나는 말조심을 하는 것이다. 부적절하고 불쾌한 어휘를 자제하는 동시에 다른 어휘로 바꿔 쓰는 수법이다. 예를 들어, 최후의 지식인들은 '부족tribu'이란 단어에 축소지향적이고 빈정대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생각에 이 단어를 전혀 쓰지 않는다. 또한 우방의 범죄는 '난입'으로, 적의 범죄는 '약탈'이라 표현한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과 오스만 터키 제국과 같은 다민족 제국이 몰락하면서 그에 따른 결과로 민족국가가 탄생했던 1830년대 이후로, 특히 그리스가 그 땅에서 이슬람적 잔재를 완전히 쓸어내면서 새로운 활력을 지닌 신생국가로 탄생했을 때부터 발칸 지역에서 빈번하게 발생한 '인종 청소'란 표현은 전체주의 체제가 새롭게 등장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1945년 우리가 쉬데트 산맥, 실레지아, 보이보딘에서 독일계를 추방했을 때에는 '인구 이동'이란 완곡한 표현을 사용했다. 결국 시선을 다른 곳에 돌리면서 완화된 어휘를 사용하는 것이 미래를 예언할 때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충돌에서 최후의 지식인들을 지켜 주는 유일한 에어백인 셈이다. - 127, 128p
 
그리고 자기만의 진리를 모두의 진리라 생각하고 감정을 객관적 평가라 착각한다면 지식인이라 자처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처럼 허망한 직업도 없을 것이다. 원래 지식인이란 이름은 자유롭게 사색하고 자료를 비판적 안목에서 분석하며 드러난 증거에 따라 반성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것이다. 객관적으로 글을 쓰고, 매사에 자신의 의견을 뚜렷이 밝히며, 이성과 지성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만을 진실이라 인정하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이름이 바로 지식인이다. 따라서 합리적 판단은 윤리의식에 근간을 둔 것이었다. - 135p
 
결국 우리가 역사적 사실들을 부인하려는 본능적인 경향은 1)그 사실들이 상식, 즉 우리 상식에 어긋나기 때문이며, 2)그 사실을 거론하는 사람들이 우리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 140p
 
어떤 비밀집단에나 거론해서는 안 되고 의문시해서도 안 되는 신성한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실제로 오랜 시간을 두고 조직된 집단에는 금기시된 과거와 신성화된 기억, 즉 초월적 영역이 있다. 당연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집단이 경험한 고유한 기억에 속하지 않는 과거는 공개되어야 마땅하다. 그래야 원칙이다. 물론 희생자가 용서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용서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술될 수 없는 것은 없다. 어떤 것이라도 언어로 표현될 수 있으며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따라서 공개된 것을 면밀히 검토할 권리를 욕되게 한다면, 그것은 민중의 의식을 종교의 세계로 되돌리고 이성을 신앙의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역사적 사실이나 그에 대한 평가의 오류를 '확인된 오류조차 고집스레 인정하지 않으려는 이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 140, 141p
 
국제 전쟁이나 시민 전쟁의 성급한 해석에 대한 재검토가 불가능해지면서 언론이 상급 법원의 역할을 하게 된다. 언론은 공격의 대상일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의 판결은 곧 최종 판결이다. 헌법도 수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언론에서 발표한 내용은 헌법이상의 가치, 즉 신성 불가침한 가치를 갖는다. 그리고 주요 언론들은 미디어 숭배론이 널리 확산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는다. 그러나 그런 권리와 역할에 걸맞은 의식을 언론은 갖고 있을까? 그래서 괴테는 "과학의 엄격성과 예술의 아름다움을 모르는 사람에게나 종교가 필요한 것이다"라고 말했던 [것이] 아니겠는가! 나는 괴테의 말에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조금이라도 더 확실한 것을 향한 열정이 안겨주는 즐거움을 모르는 사람은 종교적 믿음에 만족해 버린다고! 종교적 믿음은 사회적 결속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예속의 수단이란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 141, 142p
 
옛날에 교회가 그랬듯이 미디어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완벽한 제도'이며 신분을 확실히 보장해 주는 매게체이다. 미디어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강력한 힘, 즉 지식인들을 끌어 모으는 강력한 힘을 갖고 있다. 특히 둘이나 셋 정도의 언론은 동일한 가치관에서 비등한 권위를 누리고 보유한 지식인들을 맞교환하면서, 다양한 지역과 수많은 대학과 연구에 흩어져 있는 이데올로기 귀족들에게 모임의 장소로 그 역할을 해준다. 물론 그들은 중앙에 마련된 게시판을 통해서만 서로 알고 있을 뿐이다.(서로 존경하기도 하지만 서로 경멸하기도 한다.) - 163, 164p

미디어에 충성을 다하는 지식인들이 아니라면 누가 민중을 선동할 수 있겠는가? 유럽의 이질분자나 내부의 적들(세습군주의 적이 하느님의 적이었듯이 이제 이들은 인간의 적이다.)을 단칼에 베어내기 위해서 누가 패거리를 그처럼 끌어 모을 수 있겠는가? 따라서 고매한 인텔리겐치아와 위대한 언론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연대한 행위는 십자군 시대에 손을 잡았던 칼과 성수채의 아류라 할 수 있다. 귀족들을 대신한 사람들이 성직을 대신한 집단과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신앙시도 없이 성직을 대신한 집단이 나날이 위세를 더해가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현격히 다르다. ...게다가 어떤 법적 위임도 받지 않는 두 세력은 공통된 강령, 즉 민주주의의 이상과 밀접히 연결된 박애주의적 보편주의라는 이름으로, 국민이 투표로 권한을 위임한 대표자들을 감시하겠다고 나선다. 그야말로 여론 민주주의가 우스꽝스럽게 뒤집힌 꼴이다. 그런데 이런 현상이 다른 어떤 국가보다 프랑스에서 유난스럽다. - 164, 165p

1400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영혼의 구원이었다. 그들에게 구원의 확신이나 약속은 누가 주었을까? 성 베드로 사원이었다. 그럼, 1900년대의 무신론자들이 가장 가치 있게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죽은 후에 그의 이름을 딴 길거리가 만들어지고 후손들이 그를 기억해주는 것이었다. 그런 바람을 누가 결정했을까? 그들에게 지식을 이어받은 사람들이 있는 곳, 즉 대학과 연구소와 출판사 등이었다. 이제 2000년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 텔레비전에 얼굴을 비치고, 남에게 비밀을 털어놓게 만들고, 텔레비전이나 라디오의 인기 순위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사실 여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시대에 다른 사람들의 생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여론의 항해를 결정하고 여론의 동향을 발표하는 수단을 지닌 사람들이 아니라면 누가 그들에게 명성을 안겨줄 수 있겠는가? 요컨대 방송국과 언론에서 쫓겨난 대중적 인물은 살아있는 시체, 즉 1400년대에 주교에게 성체배령을 거부당한 선량한 기독교인처럼 존재의 고뇌에 싸인 채 생명을 연명해야 하는 사람이다. - 170, 171p

하지만 오귀스트 콩트는 그런 관계를 영적인 권력 행사에서 찾아내면서 일시적인 권세를 탐하는 교만과 대립되는 것으로 허망한 것이라 탄식하지 않았던가. 지식인은 원래 교만한 사람이다. 지식인이 목표로 삼는 영향력이란 것이 베스트셀러로 상징되는 사회적 개인(타인과의 관계를 의식하는 개인)으로서의 확인을 끊임없이 재확인하려는 노심초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인이 지식인을 지배한다. 따라서 본질적인 욕망이나 꿈을 드러낼 수 없다. 결국 지식인의 존재는 경쟁자를 흉내낸 것이며 따라서 위선적인 것이다. - 172p 누가 그대를 대주교로 만들어 주었는가? 누가 그대를 백작으로 만들어 주었는가?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누구에게나 타인의 존재가 필요하다. 최후의 지식인들이 이론화한 것을 프랑스 언론은 각색해서 퍼뜨린다. 최후의 지식인들은 참여를 독려하고 프랑스 언론은 명단을 작성한다. 귀족을 대신한 지식인들은 계획표를 제시하고, 성직을 대신한 매스컴은 어리석은 대중(독자와 청취자)과 계획을 실천할 도구를 제공한다. 국가를 도덕적으로 힐난하는 것이 가능해지고, 국가를 궁지에 몰아넣는 것은 더욱 쉬운 일이 되었다. 박사라는 허명으로 심심파적으로 성직(언론)의 종사자들에게 명예박사를 수여한다. 대신 언론은 '위대한 지식인'들에게 마음대로 떠들 수 있는 좌판을 마련해준다. 둘은 화기애애한 협조 체제 하에 서로가 전공인 부분을 책임진다. - 174p

물론 지식인이란 이름의 상속과 그 역할의 계속성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름을 물려받았다고 그 역할까지 물려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최후의 지식인들은 땀을 흘리지 않으면서 존중받기를 원한다. 의무 없는 권리만을 요구한다. 100년 만에 민주주의의 엘리트들은 기생충이 되었다. 그 탁월한 처세술이 그럴듯한 업적도 없이 얼마나 오래 버틸 수 있을까? - 181p

그동안 우리는 두툼한 책을 만들기 위해서 절대적인 필요도 없는 글을 무수히 써왔다. 또한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사건에 지나치게 성급하게 반응했으며, 도덕적 성향에 물들어 충분한 근거도 없이 분노를 터뜨렸다. 도덕적 성향에 물들어 충분한 근거도 없이 분노를 터뜨렸다. 그들이 확보한 자료까지 후무리면서까지 "그 사건은 종결되었다. 이제 일상의 생활로 돌아가자."고 끝내려 했던 까닭에, 분별의 법칙이 그들의 비행에도 적용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망각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과거에 멋모르고 저지른 파렴치한 비행이 어느 정도이든 간에, 또한 죄를 속죄하는 제삭 어떠하든 간에, 증거에 입각해서 판결을 내리게 될 심판관은 지독한 환멸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 209p

이하는 옮긴이의 글이다.

이것을 정의를 다시 정리해 보면, 지식인은 '어떤 사물이나 사건에 대해서 명료하게 인식해서 그로부터 깨달은 바를 갖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그 깨달음을 사회적 상황에 따라 가감하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거나 행동에 옮기는 것은 당연한 조건이다. 따라서 문제는 명료한 인식이다. 대체 명료한 인식이란 무엇일까? 요즘 우리 사회는 언론사의 세무조사를 두고 양 갈래 의견이 분분하다. 정치인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양 갈래로 의견이 나누어졌다. 하나는 세무조사가 적법한 행위였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언론을 길들이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다. 너무나 다르다. 왜 이렇게 다를까? 둘 중의 하나가 사실이라면, 둘 중의 하나는 명료한 인식을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쩌면 명료한 인식을 했더라도 자신의 이해관계나 사회적 상황에 영향을 받아 거짓말을 함으로써 지식인의 기본 조건마저 위반한 것이다. - 228, 229p

레지 드브레의 지적대로, 우리는 "도덕적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보다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에게 더 큰 찬사를 보내는 시기"에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기야 우리 주변에서 진정으로 존경할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지만,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진실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은 많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을 사랑하고 지원하는 모임까지도 있다. 드브레가 말하듯이 지식인에게 구하는 것을 정치인에게 요구할 수는 없다. 그 역도 마찬가지이다. - 229, 230p

드브레를 대신해서 결론을 내리자면 지식인은 언제나 비판적인 세력이어야 한다. 물론 건설적인 비판이어야 한다. 물론 때로는 욕설까지 퍼부어도 좋다. 그렇기 때문에 이념을 장식물로 여기고 학문을 본령으로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념은 무책임하게 떠들어댈 수 있는 것이지만 학문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학문은 언제나 명료한 인식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라도 비판적 위치에 서지 못하는. 지식인은 학문을 앞세웠더라도 명료한 인식에 의한 깨달음이 부족하다는 증거이다. 비유해서 말하면, 서울의 북단에 있는 도봉산은 보는 위치에 따라서 달라 보이기 때문이다. - 230p